수년 전부터 음력설에 새해 인사를 하는 것은 망설여집니다. 1월 1일 즈음에 다한 인사를 다시 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합니다. 그럼에도 음력설은 여전히 추석과 더불어 가장 긴 명절입니다. 올해는 연휴가 더 길어졌습니다. 휴가를 잘 쓰면 긴 연휴를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
여러분의 긴 연휴는 어떤가요? 이 레터를 연휴가 끝나고 열어 보시는 분들도 있을 테니 긴 쉼을 보냈을 테지요. 저는 이번 설 연휴에 어디에도 가지 않습니다. 아무런 약속도 잡지 않았고요. 집에 있을 예정입니다. 긴 연휴 동안 생존할 수 있는 식자재도 구비해 두었습니다.
긴 연휴 동안 무얼 할 것이냐면 독서와 영화감상을 할 예정입니다. 늘 좋아했던 거라 게을리할 일이 없는 행위를 굳이 연휴의 미션으로 넣은 이유는 이렇습니다. 여러분도 사놓고 아직 읽지 않은 책이 있을 겁니다. 저도 물론 있습니다. 심지어 사놓은지조차 잊은 책들도 있습니다. 그러고는 도서 구독 서비스 등을 통해 새로운 책들을 계속해서 책장에 더 쌓고 실제로 새로운 책들을 계속해서 (주로 충동적으로) 먼저 읽습니다. 영화도 그렇지요. OTT서비스에서 ‘보고 싶은 영화’에 넣어놓고는 당체 보지 않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명작인데 안 봐서 의무감에 넣어놓은 영화도 있고 한때 좋아했던 감독의 영화라 올려놓은 영화도 있습니다. 이번 연휴에 고르지 않고 어떠한 기준도 없이 리스트에 먼저 올라간 순서대로 하루에 두 편씩 볼 생각입니다. 책은 지금 보니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현대’와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 스티븐 핑커의 ‘글쓰기의 감각’, 요한 G. 치어만의 ‘고독에 관하여’ 등이 있네요. 역시 하루에 한 권씩 독파해볼까 합니다.
유튜브 쇼츠와 인스타그램 릴스 지옥을 뚫고, 넷플릭스의 최신 영화와 자극적인 시리즈의 장막을 뚫고, 이 어려운 숙제를 해볼까 합니다. 어째선지 신년부터 인생에 밀린 숙제들이 지분거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또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숙제부터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며칠 동안 아침 운동을 재개하고, 건강한 먹거리로 장을 보고, 집안 청소도 했습니다. 이제 읽지 않은 책과 보지 않은 영화를 보려고 합니다. 실은 하지 않아도 되거나 필요 없는 숙제도 더러 있습니다만 위의 숙제들을 저는 해야 하는 숙제로 규정하기로 했습니다. 정확히는 제가 ‘선택하는’ 것들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고, 미래에 더 나은 선택(주로 진실된 쪽으로)을 할 수 있는 거름을 만들고자 함입니다.
여러분도 남은 연휴 혹은 돌아오는 주말에는 ‘보고 싶은 영화’에 올려 두고 계속해서 보지 않은 영화를 한 편 보면 어떨까요? 사회적인 선택에 의해서였건, 호기심이었건, 이상적인 자아로서 선택했건 그것을 본다면 무언가 한 가지는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생각보다 재밌었다는 긍정적인 결과일 수도 있지만 결국 시청 중간에 포기를 하더라도 안목의 데이터베이스를 수정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됩니다. 또는 이상적 자아를 위해 현재의 자아는 얼마큼의 인내를 가질 수 있는지 측정해 볼 수 있습니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같은 거면 좋은 실험 대상입니다). 무엇보다, 꺼림칙하게 계속해서 인생의 뒤에 뭔가를 남겨놓는 느낌에 익숙해지지 않는 게 좋겠지요. ‘보고 싶은 영화’ 목록에서 과감하게 삭제하는 것도 좋은 과제 해결이겠습니다.
연휴가 끝나면 대개 무거운 몸으로 일터로 돌아가기 쉽습니다. 뭔가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또는 연휴에서 뜻하지 않은 작은 성취를 거머쥐고 다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